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남명학파의 인물들 南冥學派的人物們
作者
:
出版日期
:
2020/04/23
閱讀格式
:
PDF
ISBN
:
9788949948867
Ⅰ. 머리말
주지하다시피 南冥曺植(1501~1572)의 학문은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
해 계승 발전되어 來庵鄭仁弘(1536~1623)과 寒岡鄭逑(1543~1620) 등의
문인들에 의해 크게 현창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였으나, 1623년 癸亥政變
으로 인한 來庵의 敗退와 더불어 급격한 침체를 맞이하다가 1728년의 戊
申事態이후 존립 자체가 거의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.
남명의 학문이 위축 일로에 이르게 된 것은 정치적인 문제 이외에도
남명의 학문에 내재한 ‘老莊爲祟’ 및 ‘釋氏上達處與吾儒一般’ 등으로 대
표되는 異端에 대한 일정한 인정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
다.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북인이 완전히 해체되어 대부분 남인화하고 일
부는 서인화하게 되었으며, 학문적으로는 釐正이란 명목으로 여러 차례의
문집 改定과정을 거치면서 남명 학문의 성리학적 측면에서의 순정함이
드러나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.
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 전국적이던 남명학파의 분포 범위
가 17세기 중반기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서부 경남 지역에
국한되기에 이르렀다.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
자들이 문과 급제를 통해 발신한 인물의 숫자도 적어지거니와 발신을 하
여도 요직에까지 이른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.
이런 상황에서 正祖가 등극한 뒤 樊巖蔡濟恭등 기호 남인을 중용하
면서, 남명에 대하여 1798년에 정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 내림으로써 강우
유림에게 학문적으로 흥기할 계기가 주어졌다. 왕의 배려에 대해 호응이
라도 하듯 1800년대에 접어들어 강우 지역에 凝窩李源祚(1792~1871, 居
星州) 四未軒張福樞(1815~1900, 居漆谷) 寒洲李震相(1818~1886, 居星
州) 晩醒朴致馥(1824~1894, 居咸安) 月皐趙性家(1824~1904, 居晉州) 端
磎金麟燮(1827~1903, 居丹城) 后山許愈(1833~1904, 居三嘉) 溪南崔琡
民(1837~1905, 居晉州) 등 걸출한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.
다시 이들을 이어서 서부 경남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만 대상으로 하더라도
老柏軒鄭載圭(1843~1911, 居三嘉) 勿川金鎭祜(1845~1908, 居丹城) 俛宇
郭鍾錫(1846~1919, 居丹城) 膠宇尹冑夏(1846~1906, 居居昌) 紫東李正模
(1846~1875, 居宜寧) 一山趙昺奎(1849~?, 居咸安) 小訥盧相稷(1855~1931,
居密陽) 晦峰河謙鎭(1870~1946, 居晉州) 松山權載奎(1870~1952, 居丹城)
深齋曺兢燮(1873~1933, 居昌寧) 重齋金榥(1896~1978, 居丹城) 등의 뛰어난
학자들이 長江大河가 밀려오듯 繼起하였던 것이다.
물천 김진호는 바로 이 시기에 단성 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로, ―단
성은 진주와 함께 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― 그의
생애와 학문 성향이 남명학의 수용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 그 양상을 살
펴보고자 한다.
(以下為AI翻譯,僅供參考)
序言
眾所周知,南冥曹植(1501-1572)的學術思想在他去世後,由其門人繼承發展,並經由來庵鄭仁弘(1536-1623)和寒岡鄭逑(1543-1620)等門人大力發揚光大,形成學派。然而,隨著1623年癸亥政變導致來庵的敗退,南冥學派迅速陷入沉寂,直到1728年的戊申事態之後,其存續本身幾乎難以為繼。
南冥學術思想之所以陷入萎縮,除了政治問題之外,南冥學術中內在對異端的某種程度認可,例如以「老莊為祟」和「釋氏上達處與吾儒一般」為代表的觀點,也是一個重要的原因。因此,在政治上,北人派完全瓦解,大部分轉為南人,部分轉為西人;在學術上,則以「釐正」為名,經過數次文集改定過程,努力彰顯南冥學術在性理學方面的純粹性。
經過這一系列過程,初期遍佈全國的南冥學派分佈範圍,在17世紀中葉之後,逐漸局限於以晉州為中心的現今慶尚南道西部地區。而且,17世紀中葉以後,慶尚南道西部地區的學者中,通過文科及第而嶄露頭角的人數也越來越少,即使有所作為,也很少能晉升到要職。
在這種情況下,正祖即位後重用樊巖蔡濟恭等畿湖南人,並於1798年由正祖親自為南冥撰寫祭文,為嶺南儒林提供了學術復興的契機。仿佛是對皇帝恩寵的回應,進入19世紀後,嶺南地區湧現出許多傑出學者,如凝窩李源祚(1792-1871,居星州)、四未軒張福樞(1815-1900,居漆谷)、寒洲李震相(1818-1886,居星州)、晚醒朴致馥(1824-1894,居咸安)、月皐趙性家(1824-1904,居晉州)、端磎金麟燮(1827-1903,居丹城)、后山許愈(1833-1904,居三嘉)、溪南崔琡民(1837-1905,居晉州)等。
緊隨其後,僅就活躍在慶尚南道西部地區的人物而言,還有老柏軒鄭載圭(1843-1911,居三嘉)、勿川金鎭祜(1845-1908,居丹城)、俛宇郭鍾錫(1846-1919,居丹城)、膠宇尹冑夏(1846-1906,居居昌)、紫東李正模(1846-1875,居宜寧)、一山趙昺奎(1849-?,居咸安)、小訥盧相稷(1855-1931,居密陽)、晦峰河謙鎭(1870-1946,居晉州)、松山權載奎(1870-1952,居丹城)、深齋曺兢燮(1873-1933,居昌寧)、重齋金榥(1896-1978,居丹城)等卓越學者如長江大河般繼起。
勿川金鎭祜正是這個時期在丹城地區活動的學者,由於丹城與晉州同為南冥學派的根據地,因此本書旨在探討他的生平與學術傾向如何與南冥學的接受相關聯,並觀察其樣貌。
주지하다시피 南冥曺植(1501~1572)의 학문은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
해 계승 발전되어 來庵鄭仁弘(1536~1623)과 寒岡鄭逑(1543~1620) 등의
문인들에 의해 크게 현창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였으나, 1623년 癸亥政變
으로 인한 來庵의 敗退와 더불어 급격한 침체를 맞이하다가 1728년의 戊
申事態이후 존립 자체가 거의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.
남명의 학문이 위축 일로에 이르게 된 것은 정치적인 문제 이외에도
남명의 학문에 내재한 ‘老莊爲祟’ 및 ‘釋氏上達處與吾儒一般’ 등으로 대
표되는 異端에 대한 일정한 인정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
다.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북인이 완전히 해체되어 대부분 남인화하고 일
부는 서인화하게 되었으며, 학문적으로는 釐正이란 명목으로 여러 차례의
문집 改定과정을 거치면서 남명 학문의 성리학적 측면에서의 순정함이
드러나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.
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 전국적이던 남명학파의 분포 범위
가 17세기 중반기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서부 경남 지역에
국한되기에 이르렀다.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
자들이 문과 급제를 통해 발신한 인물의 숫자도 적어지거니와 발신을 하
여도 요직에까지 이른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.
이런 상황에서 正祖가 등극한 뒤 樊巖蔡濟恭등 기호 남인을 중용하
면서, 남명에 대하여 1798년에 정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 내림으로써 강우
유림에게 학문적으로 흥기할 계기가 주어졌다. 왕의 배려에 대해 호응이
라도 하듯 1800년대에 접어들어 강우 지역에 凝窩李源祚(1792~1871, 居
星州) 四未軒張福樞(1815~1900, 居漆谷) 寒洲李震相(1818~1886, 居星
州) 晩醒朴致馥(1824~1894, 居咸安) 月皐趙性家(1824~1904, 居晉州) 端
磎金麟燮(1827~1903, 居丹城) 后山許愈(1833~1904, 居三嘉) 溪南崔琡
民(1837~1905, 居晉州) 등 걸출한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.
다시 이들을 이어서 서부 경남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만 대상으로 하더라도
老柏軒鄭載圭(1843~1911, 居三嘉) 勿川金鎭祜(1845~1908, 居丹城) 俛宇
郭鍾錫(1846~1919, 居丹城) 膠宇尹冑夏(1846~1906, 居居昌) 紫東李正模
(1846~1875, 居宜寧) 一山趙昺奎(1849~?, 居咸安) 小訥盧相稷(1855~1931,
居密陽) 晦峰河謙鎭(1870~1946, 居晉州) 松山權載奎(1870~1952, 居丹城)
深齋曺兢燮(1873~1933, 居昌寧) 重齋金榥(1896~1978, 居丹城) 등의 뛰어난
학자들이 長江大河가 밀려오듯 繼起하였던 것이다.
물천 김진호는 바로 이 시기에 단성 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로, ―단
성은 진주와 함께 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― 그의
생애와 학문 성향이 남명학의 수용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 그 양상을 살
펴보고자 한다.
(以下為AI翻譯,僅供參考)
序言
眾所周知,南冥曹植(1501-1572)的學術思想在他去世後,由其門人繼承發展,並經由來庵鄭仁弘(1536-1623)和寒岡鄭逑(1543-1620)等門人大力發揚光大,形成學派。然而,隨著1623年癸亥政變導致來庵的敗退,南冥學派迅速陷入沉寂,直到1728年的戊申事態之後,其存續本身幾乎難以為繼。
南冥學術思想之所以陷入萎縮,除了政治問題之外,南冥學術中內在對異端的某種程度認可,例如以「老莊為祟」和「釋氏上達處與吾儒一般」為代表的觀點,也是一個重要的原因。因此,在政治上,北人派完全瓦解,大部分轉為南人,部分轉為西人;在學術上,則以「釐正」為名,經過數次文集改定過程,努力彰顯南冥學術在性理學方面的純粹性。
經過這一系列過程,初期遍佈全國的南冥學派分佈範圍,在17世紀中葉之後,逐漸局限於以晉州為中心的現今慶尚南道西部地區。而且,17世紀中葉以後,慶尚南道西部地區的學者中,通過文科及第而嶄露頭角的人數也越來越少,即使有所作為,也很少能晉升到要職。
在這種情況下,正祖即位後重用樊巖蔡濟恭等畿湖南人,並於1798年由正祖親自為南冥撰寫祭文,為嶺南儒林提供了學術復興的契機。仿佛是對皇帝恩寵的回應,進入19世紀後,嶺南地區湧現出許多傑出學者,如凝窩李源祚(1792-1871,居星州)、四未軒張福樞(1815-1900,居漆谷)、寒洲李震相(1818-1886,居星州)、晚醒朴致馥(1824-1894,居咸安)、月皐趙性家(1824-1904,居晉州)、端磎金麟燮(1827-1903,居丹城)、后山許愈(1833-1904,居三嘉)、溪南崔琡民(1837-1905,居晉州)等。
緊隨其後,僅就活躍在慶尚南道西部地區的人物而言,還有老柏軒鄭載圭(1843-1911,居三嘉)、勿川金鎭祜(1845-1908,居丹城)、俛宇郭鍾錫(1846-1919,居丹城)、膠宇尹冑夏(1846-1906,居居昌)、紫東李正模(1846-1875,居宜寧)、一山趙昺奎(1849-?,居咸安)、小訥盧相稷(1855-1931,居密陽)、晦峰河謙鎭(1870-1946,居晉州)、松山權載奎(1870-1952,居丹城)、深齋曺兢燮(1873-1933,居昌寧)、重齋金榥(1896-1978,居丹城)等卓越學者如長江大河般繼起。
勿川金鎭祜正是這個時期在丹城地區活動的學者,由於丹城與晉州同為南冥學派的根據地,因此本書旨在探討他的生平與學術傾向如何與南冥學的接受相關聯,並觀察其樣貌。
- 出版地 : 韓國
- 語言 : 其他語文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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